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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대지진(1755)-신학과 과학을 뒤흔든 사건

📑 목차

    18세기 중엽, 유럽의 가장 화려한 해상도시 중 하나였던 포르투갈의 리스본은 하루아침에 폐허로 변했다. 1755111, 만성절의 아침이었다. 수많은 시민이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순간 대지가 요동쳤고, 도심의 건물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불길이 솟아올라 잿빛 연기를 토해냈고, 항구로 피한 사람들은 곧 밀려드는 거대한 해일에 휩쓸렸다. 리스본 대지진은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신의 섭리와 인간 이성에 대한 유럽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흔든 전환점이었다. 당시의 관측과 기록, 그리고 재건 과정은 지진학·건축공학·도시계획의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리스본

     

     

    세 가지 재난의 연쇄: 강진, 해일, 대화재

    지진의 규모는 현대적 분석에 따라 모멘트 규모 8.5에서 9.0 사이로 추정된다. 진앙은 대서양의 아조레스지브롤터 단층대 부근, 해저 약 200km 지점이었다. 5분간 이어진 흔들림은 도심의 석조 건물을 거의 모두 붕괴시켰다. 성당의 높은 천장과 대리석 기둥은 무게를 이기지 못했고, 좁은 골목길에는 벽돌과 석재가 산처럼 쌓였다. 당시의 목격담에는 땅이 물결치듯 요동쳤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지진음보다 크게 들렸다는 표현이 남아 있다.

     

    그러나 파괴의 시작은 지진이 아니었다. 수 분 후 바닷물이 비정상적으로 빠져나간 뒤, 거대한 파도가 항만을 덮쳤다. 높이 수십 미터의 해일이 강둑을 넘어 도시 중심까지 밀려들었고, 피신한 군중은 다시 휩쓸렸다. 파도는 선박을 육지로 밀어 올려 시장 한복판에 좌초시키기도 했다. 곧이어 무너진 가옥에서 흩어진 불씨가 창고의 유류와 목재에 옮겨붙으며 대화재가 일어났다. 삼중 재난이 겹쳐 도시 전체가 붉게 타올랐다. 화염은 6일간 이어졌고, 잔존 구조물마저 무너뜨렸다. 당시 인구 약 27만 명 중 3~5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과 과학의 결합: 체계적 조사와 지진학의 태동

    리스본 정부는 혼란 속에서도 이례적인 대응을 선택했다. 총리 마르케스 드 폼발은 즉시 전국의 지방관에게 지진 설문지를 배포했다. 각 지역의 흔들림 강도, 해일의 높이, 우물 수위 변화, 진동 방향 등을 세세히 묻는 문항이었다. 이는 세계 최초의 국가 차원의 재난 조사로, 오늘날 지진학에서 질적 진도 조사의 기원으로 평가된다.

     

    이 자료를 기반으로 유럽의 과학자들은 지진이 단순한 신의 벌이 아니라 지구 내부의 운동에서 비롯된 현상임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리스본 보고서를 참고하여 지진의 물리적 원인에 대한 시론을 발표했다. 그는 지하의 공기 압력과 암반의 변형을 원인으로 설명하려 했는데, 비록 오늘날의 판구조론과는 다르지만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로서 큰 의미가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학자들도 리스본의 피해 분포를 지도화하며 최초의 지진 피해도(地震被害圖)를 제작했다. 이 과정에서 진앙진원의 개념이 서서히 정립되었다.

     

    신학과 철학의 충돌: 신정론의 붕괴와 계몽의 촉진

    리스본 대지진은 단순한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사상적 충격이었다. 당시 유럽은 신의 질서 아래 세계는 선하게 설계되었다는 낙관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앙의 도시 리스본이 가장 신성한 날, 수많은 신자가 성당에서 압사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선한 자에게 왜 재앙이 내리는가?”

     

    철학자 볼테르는 캉디드를 통해 이러한 낙관주의를 통렬히 풍자했다. 그는 모든 것은 최선의 세계에서 일어난다는 주장에 대해, 리스본의 참상을 예로 들어 반문했다. 이 사건은 유럽의 지성계에 회의와 비판정신을 퍼뜨렸고, 종교 중심의 세계관을 과학적·합리적 사고로 전환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신학자와 철학자, 정치가들이 재난의 의미를 두고 격렬히 논쟁하는 동안, 실무자들은 현실의 복구에 집중했다. 인간의 이성이 신의 섭리를 대신해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리스본은 증명해 보였다.

     

    재건의 실험: 폼발린 계획과 근대 도시의 탄생

    폼발 총리는 죽은 자를 매장하고, 산 자를 먹여라라는 명령을 내린 뒤, 곧바로 도시 재건을 지시했다. 그는 도로망을 직선으로 정비하고, 건물의 높이와 폭을 규격화해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 새로 세운 리스본 도심은 방화와 지진에 강한 구조로 설계되었고, 그 중심에는 폼발린 케이지(Pombaline cage)’라 불리는 독특한 내진 골조가 있었다. 이는 목재 가새를 대각선으로 배치해 벽체가 흔들릴 때 응력을 분산시키는 구조로, 실물 진동시험까지 진행된 세계 최초의 내진 실험으로 꼽힌다.

     

    이후 포르투갈의 재건 과정은 행정과 과학이 결합한 근대적 도시계획의 시초가 되었다. 규격화된 모듈형 주택, 넓은 가로, 중앙 광장, 배수 시스템은 도시 재난에 대한 공학적 대응의 모델이 되었다. 또한 정부는 피해 보상과 재건 자금을 관리하기 위해 국가 재정 구조를 개편했고, 건물 단위의 가치 평가 제도를 도입해 근대적 보험 개념이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 사회에 남긴 교훈: 복합재난과 회복력의 모범

    리스본의 경험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첫째, 복합재난은 단일 원인보다 더 큰 피해를 낳기 때문에, 재난 시나리오를 단계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지진 뒤 화재와 해일이 연속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대피 경로, 연료 저장소 위치, 고지대 안전구역을 미리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표준화된 정보 수집이 대응의 질을 좌우한다. 리스본의 질문서 조사는 오늘날의 피해도 작성, 지반진동 모델링, 재난 데이터베이스로 발전했다. 셋째, 제도적 회복력이 중요하다. 재난 직후 신속한 행정결정과 사회적 신뢰가 복구 속도를 결정한다는 점을 리스본은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신의 뜻을 이해하려는 신학의 시대에서,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는 과학의 시대로 넘어가는 문을 열었다. 지진 이후 유럽은 지질조사와 지진계 개발, 도시계획법 제정 등으로 나아갔으며, 오늘날의 방재 시스템 역시 그 경험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리스본 대지진은 인류가 자연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기록하고 배우며 진보할 수 있음을 증명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